작년에 저희와 오래 거래해온 EU 대기업 바이어로부터 갑자기 긴 설문지가 이메일로 왔습니다. 온실가스 배출량, 인력 현황, 인권 정책 여부까지 묻는 항목이 수십 개나 있었는데, 저희 같은 중소 무역상사가 이런 걸 다 갖추고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담당자로서 솔직히 “이걸 다 어떻게 채우나” 하고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게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 때문에 대기업들이 공급망 전체에 요구하기 시작한 자료였습니다. 저희는 EU에 직접 진출한 기업이 아니라 규제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대기업 바이어의 협력업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요청을 받게 된 겁니다.

처음엔 다 채워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 설문지를 받았을 때는 그냥 전부 다 답변해야 하는 줄 알고, 며칠 동안 자료를 끌어모으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거래처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EU가 이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옴니버스 간소화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2026년 3월 18일 발효된 개정 지침에 따라 대기업이 협력업체에게 요구할 수 있는 데이터가 VSME라는 중소기업용 기준 범위로 제한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희가 받은 설문지를 다시 살펴보니, 확실히 일부 항목은 VSME 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요청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이 항목은 저희가 답변 의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인 부탁드린다”고 회신했더니, 실제로 바이어 쪽에서도 인정하고 해당 항목을 제외해줬습니다.

그래도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더라

다만 이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게 있습니다. 법적 의무가 줄었다고 해서 대기업 바이어가 자체적으로 요구하는 기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희 거래처는 VSME 범위 내에서도 여전히 기본적인 인권정책 여부나 강제노동 관련 자기진단서는 꾸준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강제노동 이슈는 규제 완화와 상관없이 여전히 민감하게 다뤄지는 부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것

VSME 기준부터 파악해두기

이 일을 겪고 나서, EFRAG가 공개하는 VSME 기준 문서를 미리 찾아봤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요청을 받으면 어떤 항목까지가 정당한 요청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본적인 데이터는 미리 정리

완전히 새로 만들기보다는, 저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에너지 사용량, 인력 현황 정도)를 정리된 형태로 준비해뒀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설문이 오면 처음부터 다시 끌어모으는 수고를 덜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래처별로 요구 수준이 다르다는 걸 인지

같은 EU 대기업이라도 회사마다 요구하는 항목과 수준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래처가 바뀔 때마다 “이 회사는 어느 정도까지 요구하는지” 미리 파악해두려고 합니다.

지금 저희가 EU 대기업 바이어의 데이터 요청을 받으면 확인하는 것

  • 요청 항목이 VSME 기준 범위 내에 있는지
  • 강제노동·인권 관련 항목은 우선적으로 성실히 답변
  • 범위를 넘어서는 요청은 근거를 들어 정중히 문의
  • 기본 데이터는 평소에 미리 정리해두기

마무리

처음 그 설문지를 받았을 때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알고 보니 저희가 다 채워야 할 의무는 없는 항목도 섞여 있었습니다. 무조건 다 맞춰주기보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요청인지 스스로 알고 있는 게 결국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방법이라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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