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초 카자흐스탄 바이어로부터 산업용 부품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러시아도 아니고 제재 대상국도 아니니 크게 고민하지 않고 견적을 준비했는데, 계약 직전 거래 은행 담당자가 “이 바이어, 최종 사용처가 어디인지 확인하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발주를 잠깐 멈추고 다시 들여다보니, 저희가 상대하던 카자흐스탄 회사가 러시아 기업의 자회사 성격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직접 러시아에 판매하는 게 아니었는데도 결국 러시아로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구조였던 겁니다. 그 뒤로 제재 리스크를 “러시아행 여부”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어디로 흘러가는가”의 문제로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때 배운 것: 최종사용자 확인은 선택이 아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저희가 가장 먼저 바꾼 것은 신규 거래처를 상대할 때의 체크리스트였습니다. 예전에는 “이 나라가 제재 대상국인가”만 확인했다면, 지금은 다음 질문을 반드시 던집니다.
- 이 회사의 지분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제재 대상 기업의 자회사는 아닌지)
- 최종적으로 이 물품을 누가, 어떤 용도로 쓸 예정인가
- 결제가 정상적인 은행 경로로 이루어지는가
특히 지분이 50% 이상 제재 대상 기업 소유인 자회사는 모기업의 제재를 그대로 승계한다는 원칙(50% Rule)을 그때 처음 실무로 접했습니다. 책으로 읽었을 때는 “그런 규정이 있구나” 정도였는데, 실제로 우리 거래에 적용될 뻔한 사례를 겪고 나니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최근 상황: 단속이 훨씬 정교해졌다
이후로 이 이슈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최근 뉴스를 보면 저희가 겪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정교해지고 있다는 걸 체감합니다. 관세청이 2026년 1월부터 5월까지 5개월 동안 적발한 무역안보 침해사범 규모가 7,703억원에 달했는데, 이는 이미 전년도 전체 실적을 넘어선 수치입니다. 그중 전략물자 불법수출 적발 금액만 2,430억원입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한국산 범용 반도체 부품이 러시아 정찰드론에서 발견됐다는 뉴스였습니다. 저희 업종은 방산과 무관하지만, “범용 부품이 제3국을 거쳐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이 사례를 보고 나니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카자흐스탄 건에서 겪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의 리스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들
신규 거래처는 반드시 지분 구조부터 확인
특히 중앙아시아, 중동, CIS 지역 신규 거래처는 계약 전에 회사 등기 정보나 공개된 지분 정보를 먼저 확인합니다. 애매하면 거래 은행이나 무역보험공사에 문의부터 합니다.
결제 경로를 눈여겨본다
정상적인 은행 경로가 아니라 제3국 계좌를 거치거나, 결제 방식이 이상하게 복잡한 요청이 오면 일단 멈추고 이유를 확인합니다. 러시아 주요 은행들이 SWIFT에서 배제된 이후로, 비정상적인 우회 결제 요청 자체가 하나의 경고 신호라는 걸 체감으로 배웠습니다.
담당자 혼자 판단하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조금이라도 애매한 지역·거래처 건은 담당자 선에서 끝내지 않고 반드시 팀 내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저 역시 그때 은행 담당자의 질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그냥 진행했을 거래였습니다.
러시아 현지에 자산이 있는 기업이라면 더 조심해야 할 것
저희는 해당되지 않지만, 러시아 현지에 법인이나 자산을 가진 업계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근 러시아의 ‘역제재’도 무시 못 할 리스크라고 합니다. 러시아가 한국 같은 제재 동참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자국 내 지분 처분에 자국 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강화했다는 겁니다. 특히 ‘루고보이 법’이라 불리는 러시아 상사소송법 조항은, 제재 대상 러시아 기업이 얽힌 분쟁에서 러시아 법원이 전속관할권을 주장하며 기존 해외 중재합의를 무효화할 수 있게 한다고 하니, 계약서에 중재조항을 명시해뒀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게 무섭더군요.
신규 거래처 리스크 점검 체크리스트 (저희가 실제로 쓰는 것)
- 거래 상대방이 OFAC·EU·우리 정부 제재 리스트에 없는지 확인했는가
- 지분 구조상 제재 대상 기업의 50% 이상 자회사는 아닌지 확인했는가
- 최종 사용처와 용도를 명확히 파악했는가
- 결제 경로가 정상적인 은행 채널을 통하는가
- 애매한 경우, 담당자 선에서 끝내지 않고 팀 검토를 거쳤는가
마무리
솔직히 그 카자흐스탄 건이 아니었다면, 저희도 “제재 리스트에 없으니 괜찮다”는 생각으로 계속 거래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문제없이 정리된 사안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저희가 얼마나 안일하게 판단하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규정을 아는 것과, 실제 거래 앞에서 그 규정이 우리 얘기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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